2001년 8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근처의 샤브샤브 집 자쿠로.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장에 갓 선임된 황창규 사장은 이건희 회장, 윤종용 부회장 등 삼성 수뇌부와 마주 앉았다. 반도체 왕국 일본의 대표 기업인 도시바가 삼성에 낸드 플래시 메모리 합작 법인 설립을 제안한 때였다. 낸드 플래시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반도체로, 스마트폰·노트북 등 모든 IT 기기의 저장장치로 쓰인다. 삼성은 당시만 해도 도시바의 특허 기술을 쓰기 위해 막대한 특허료를 지불하고 있었다. 그런 도시바가 삼성의 성가신 추격을 의식해 아예 공동 사업을 제안했고 삼성 수뇌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황창규 사장은 당차게도 독자 사업을 하겠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해볼 만한가? D램도 미래에는 없어진다는데? 자신 있는가?” 질문을 받은 황 사장은 모바일용 메모리의 성장 가능성과 함께, 생산라인 준비 등 그동안 어떻게 독자 사업을 대비해 왔는지 설명했다. 이윽고 이 회장은 “도시바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독자 사업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삼성 메모리 사업을 이끈 황창규 전 사장의 저서(著書) ‘황의 법칙’에 나오는 결단의 순간이다. 삼성은 그해 최악의 반도체 불황에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1년 반 만에 도시바를 앞질렀다. 다시 1년 뒤에는 플래시 메모리 전체 시장에서 세계 1위 인텔을 꺾었다. 삼성은 이어 당시 세계 최고의 휴대폰 제조사인 핀란드 노키아와 애플의 아이팟·아이폰에 제품을 공급하면서 낸드 플래시를 한국 반도체의 핵심 축으로 키웠다. 이제는 낸드를 쓰지 않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은 상상조차 힘들다. 반면 도시바는 삼성에 순위만 뒤진 게 아니라 아예 몰락했고 인텔도 플래시 사업을 결국 매각했다.
삼성의 플래시 메모리 사업은 후발주자로 출발해 세계 1등에 오른 한국 산업계의 대표적인 혁신 사례로 꼽힌다. 미래를 대비한 R&D(연구·개발)와 경영진의 정확한 시장 예측, 불황기에 무모해 보일 정도로 투자를 단행한 오너의 결단, 300개 공정을 거치는 반도체 신제품 생산을 단 9개월 만에 완료해 노키아에 납품한 임직원들의 헌신이 어우러진 결과다. 비행기 고장으로 첫 미팅을 펑크 낸 황 사장은 불같이 화를 내는 스티브 잡스 CE0를 상대로 끝내 제품 공급을 성사시켰다. 문제는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이런 혁신 스토리를 갈수록 듣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비대해진 한국 기업들이 품질보다는 수익성을, 위험을 무릅쓴 도전보다는 리스크 관리, 주가 관리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기업 혁신이 국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같은 미친 기업가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미국과 과거의 위대한 유산을 팔아먹는 데 안주한 유럽을 비교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08년 EU(유럽연합)의 GDP(국내총생산)는 14.22조달러(약 1경9012조원)로 미국(14.77조달러)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올해는 15.07조달러로 미국(26.86조달러)의 60%에도 못 미친다. 지난 15년간 미국이 82%나 성장한 반면 EU 성장률은 고작 6%에 그친 탓이다. 지금의 추세가 계속될 경우 2035년엔 미국과 유럽의 1인당 GDP 격차가 지금 일본과 남미 에콰도르의 격차만큼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자동차 강국 독일은 전기차 전환을 등한시하다가 자신들이 기술을 전수해준 중국의 전기차에 밀려 안방까지 내줄 처지다. “독일 자동차 산업의 지붕이 불타고 있다”고 탄식이 나올 정도다. 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은 제조업의 몰락으로 무려 1100만명의 인구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도도 나온다.
고령화와 과도한 중국 의존도, 기존 주력산업의 쇠퇴 등 독일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한국 경제는 과연 미국과 유럽 중 어느 쪽으로 향할까. “5년,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는 이건희 회장의 말이 새삼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