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MI라는 단어는 왜 영어에 없는가 — 그리고 그것이 리더를 만드는 방식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던 시절,
해외 스타트업 투자 건을 검토하고 내부 보고서를 올리던 중이었습니다.
새로 온 인도계 미국인 임원이 제게 묻습니다.
“Ethan, what’s this thing?”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품의 상신 문서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했죠.
“It’s basically getting an approval to move forward.”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Okay. But what are these?”
그가 가리킨 건 아래 항목들이었습니다.
하나하나 설명을 마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Let’s just call it… PUMI.”
🤔 “같이 결정하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다르다”
그 임원은 구조가 복잡하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류’를 느꼈던 겁니다.
✔️ 결재자가 있고
✔️ 합의자도 있으며
✔️ 병렬 결재도 존재합니다
겉으로는 명백한 팀 의사결정 구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어느 순간부터, 책임은 한 사람에게만 쏠립니다.
문서상으론 다 함께 하는 것처럼 보여도,
품의를 통과시키기 위한 노력은 오롯이 한 사람의 몫입니다.
🇰🇷 한국형 리더십 — 혼자 싸우는 자
삼성에서 저는 수많은 품의를 올렸습니다. (진짜로...)
합의자가 코멘트를 달면 제가 대응해야 했고,
병렬 결재자가 반대하면 제가 설득해야 했고,
결재자가 보류하면 제가 다시 설명해야 했습니다.
같이 시작했지만, 끝까지 가는 건 혼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리더는
- 누구보다 빠르게 결정하고,
- 누구보다 독하게 실행합니다.
- 누구보다 고립되기도 쉽습니다.
🇺🇸 미국형 리더십 — 함께 가는 자
이후 구글에서의 경험은 전혀 달랐습니다.
Approval line 을 타고 올라갈 수록 내 편이 늘어났습니다.
- 법무팀이 사인하면 그들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고
- 재무팀이 사인하면 그 책임도 함께 집니다
- 이견이 생기면, ‘니가 해결해’가 아니라 ‘함께 조율하자’는 흐름이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프로세스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철학은 전혀 다릅니다.
구글은 ‘공유된 책임’의 구조,
삼성은 ‘귀속된 책임’의 구조였습니다.
🎯 구조가 리더를 만든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쓴 이야기라 어느 정도의 일반화를 한 것은 당연히 맞습니다.
맞습니다, 스티브잡스는 어쩌면 웬만한 한국인 리더보다 더 독단적이었고,
한국 리더들 중에서도 팀워크를 중시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제 실제 경험을 기준으로 크게 분류를 한 것이라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 어느 쪽이 더 나은가?
둘 다 장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한쪽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저는
고속 성장기에는 한국형 리더가 훨씬 유리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빠른 판단, 단독 실행, 개인이 감수하는 책임
- 이 모든 요소가 초기 산업화, 글로벌 추격전, 위기 돌파에 강력했습니다
삼성은 그 구조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묻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키워야 할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 불확실성이 높고
- 관계가 수평화되고
- 판단보다 조율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에
계속 ‘혼자 싸우는 리더’를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책임지는 리더’를 설계해야 할까요?
🪄 품의(PUMI)는 단지 문서가 아니다
그건 일하는 방식이고,
결정의 구조이며,
다음 세대 리더십을 만드는 설계도입니다.